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노사의 굴욕 (문단 편집) == 여담 == * 참고로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3세]]는 카노사의 마틸다 대백작의 아버지였던 [[보니파초 4세]]와 원수지간이었다. 그래서 마틸다의 가족들 중 아버지는 암살당하고, 유일한 상속자인 남동생 [[페데리코(토스카나)|페데리코]]마저 황제의 포로로 끌려가 죽었다. 이때 마틸다와 과부가 된 그녀의 어머니에게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를 탐내며 우선 첫 번째 표적으로 이탈리아 왕의 자리를 노리던 하 로렌(로트링겐, 로타링기아)의 고드프리 3세'''[[https://en.wikipedia.org/wiki/Godfrey_III,_Duke_of_Lower_Lorraine|#]]'''가 접근했다. 고드프리 3세는 로렌 지방의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고 있어 하인리히 3세와는 앙숙지간이었다. 그는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영지에서 추방되기를 밥 먹듯이 했고[* 그의 형제가 교황 스테파노 9세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_%EC%8A%A4%ED%85%8C%ED%8C%8C%EB%85%B8_9%EC%84%B8|#]]'''] 과부가 된 마틸다의 어머니에게 접근해 마틸다 가문의 엄청난 영지와 자신의 영지를 합쳐서 황제에게 대항하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찌질한 황제가 아니었던 하인리히 3세는 폭풍처럼 군대를 휘몰아쳤다. 결국 고드프리 3세는 결혼한 마누라와 양녀를 팽개치고 도주했다. 하인리히 3세는 적이 많았고, 이러한 것을 해소해야 했지만 그가 붕어한 후, 어린 아들 하인리히 4세를 대신해 섭정한 하인리히 3세의 황후 아그네스 덕분에 황제가 적잖이 넓혀놓은 직할령이 공작들의 환심을 사고자 뿌려지면서 황제권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황제를 업신여기게 되었다. 더욱이 하인리히 3세의 깽판 짓으로 이미 불구지천의 원수가 된 하 로렌의 고드프리 3세와 카노사의 마틸다는 이를 갈다 못해 칼을 갈았고, 하인리히 4세는 그의 몰락마저도 카노사의 여백작과 함께하게 된다. [[https://en.m.wikipedia.org/wiki/Matilda_of_Tuscany|#]] * [[중학교]] 사회(역사) 교과의 대중적인 영향과 더불어 어감상 쫀득한 궁합이 맞물리다 보니, '''○○의 굴욕'''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사실상 이것의 파생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 [[일본]]에서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것 중 가장 멋있는 단어로 이 카노사의 굴욕이 뽑히기도 했다(…). 왠지 한번 들으면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는 임팩트 때문이라고. 참고로 2위는 근소한 차이로 [[장미 전쟁]], 3위는 [[보스턴 차 사건]]이었다. * [[후지TV]]에서는 1990년에서 1991년까지 이 이름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 했다. 현대 일본의 소비 문화사를 20세기 이전의 역사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인기에 힘입어 방송 종료 후인 2008년에도 일시 특집이 방송되었다. * 1997년 [[IMF 사태]]를 당시 이탈리아 신문에서는 이것으로 비유했다. * [[칼치오폴리]] 당시 [[ACF 피오렌티나]]는 처음에는 [[유벤투스]]의 악행에 반대하고 맞섰으나 유벤투스가 도리어 압도적인 자금력과 영향력을 앞세워 그들에게 보복을 가하자 굴복하고, 칼치오폴리 공범이 되었다. 이에 [[http://www.tiamointer.kr/xe/calcioboard2/1120457|칼치오폴리 대법원 판결문]]에서 대놓고 '''현대판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